편지 2


3부 편지
편지 2

사모님의 편지를 받고 사모님이 지금 어떠한 생활을 하고 계시 다는 것을 알게 되니 정말로 꿈만 같습니다. 사람이 한평생 살아 가는 길은 결코 평탄한 것이 아니며,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상 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엉뚱한 곳으로 인도된다고 하는 말들을 곧 잘 합니다만, 과연 그렇다고 느껴집니다. 세상이 그대로 평탄했더라면, 사모님은 지금쯤 퇴직하신 주인 양반과 함께 조용한 바닷가 별장에서 노후를 편안히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아옹다옹 세상과 싸울 필요도 없이 조용히 꽃꽂이를 한다든가 시를 쓴다든가 그 밖의 취미생활을 하면서 지내셨을 것 입니다. 그런데 전화戰火로 주인 양반을 잃고 회사는 망했으며, 가지고 있던 돈도 화폐가치의 하락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되니 정말 큰 곤경이 빠지셨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옛날 사모님이 데 리고 있던 가정부의 문간방을 얻어서 살고 있으며, 시중에 내다 파는 인형을 그리는 일을 받아 그것으로써 그날그날을 겨우 살아 가신다니 …. 라디오를 듣건대 도리우미야마(鳥海山)는 벌써 눈 으로 하얗게 덮였다니, 밤에는 그림을 그리는 손끝이 퍽이나 시 릴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모님의 편지에 따르면, "아, 이 무슨 업보로 이 나이에 이렇 게 고생을 하지 않으면 안 될까? 내 일생을 되돌아보아도 이런 벌 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는데, 저 전후의 혼란기에 갖은 악독한 행위를 해서 일확천금을 한 갑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일 평생 별로 착한 일도 하지 않았는데 죽을 때까지 자기 멋대로 놀 고먹고 편하게 사는 친구들도 많이 있다. 하느님은 정말 계시는 걸까?"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사모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심정은 잘 알겠습니다. 그것만을 생각하면 정말 이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인간 의 생명이 다만 이 세상의 것만이라면 하느님이 계실지 의심해 봐 야겠지요. 그리고 행복이 편안한 생활만을 뜻한다면 확실히 상벌 이 엉터리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인간의 생명이 무덤 저편으로 영원히 이어져 있다는 것 을 믿고, 진정한 행복이란 천국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 때 비로소 맛볼 수 있는 것임을 안다면, 사모님이 지금 도리우미야마 기슭의 작은 마을에서 늙고 야윈 손으로 인형의 얼굴을 그리면서 날마다 끼닛거리를 얻고 계시다는 그것이, 특별히 하느님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임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사모님은 젊었을 때부터 무척 동정심이 많으신 분으로 이웃에 서 곤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남몰래 도와왔다는 사실은 제 귀 에도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사모님은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 사람 들의 평판에 오르내리는 것을 피하려 남몰래 덕을 베푸셨기 때문 에, 세상에서는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사모님께 풍성한 상급을 내리실 것입니다. 지금 고 통을 당하고 계시다는 그것이 바로 그 상급의 나타남이 아니겠습 니까? 일평생 별로 착한 일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주 편안하게 노후 를 보내고 있다는 말을 편지에 쓰셨습니다만, 나쁜 일도 착한 일 도 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는 하지만 사랑하지는 않습 니다. 그렇기 때문에 벌도 상도 받지 못한 채 아무 뜻 없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이 편지에서 설교할 생각은 아닙니다. 사실은 조금 전에 제가 생각한 그 현상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사모님께 전하고 자 합니다. 오늘은 가야노가 다니는 초등학교 운동회 날이었습니다. 별로 큰 오락이나 즐거움이 없는 농촌에서는 1년에 한 번밖에 없는 운 동회는 큰 잔칫날과 같습니다. 달음박질하는 어린이들보다 그것 을 구경하는 어른들이 더 기뻐합니다. 맛있는 도시락을 만들려고 여러 준비를 하는 등 며칠 전부터 분주합니다. 그곳 도리우미야 마가 눈에 덮여 하얗게 변했다고 하는데, 나가사키는 아이들이 셔 츠 하나를 입고 달리기에 꼭 알맞은 기후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운동장의 확성기에서 "오늘은 맑은 날씨가 계속 된다고 합니다." 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있으며, 병상에 누워있는 제 어깨까지 들먹거리게 하는 호각소리, "와와!" 하고 환성을 올리며 응원하는 소리, 초등학교는 우리 집에서 100미터도 채 떨어져 있지 않으므 로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와!" 하고 외치는 소리가 잠시 멎고 조용합니다. 아하, 지금 아 이들은 호주머니에서 고구마엿을 꺼내 먹고 있겠구나 생각합니다. 관람석에는 물통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는 시늉을 하면서 몰래 술 을 마시는 아버지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도시락을 살짝 열고, 김 밥을 꺼내 먹는 엄마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점심때가 되면 그 근 처 일대에 돗자리를 깔고 가족끼리 모여앉아 도시락을 먹겠지요. 아무튼 구경하는 사람들은 즐겁기만 합니다. 골 앞에서 서로 지 지 않으려고 어깨를 밀치면서 달리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줄 다리기를 하면서 새빨간 얼굴이 되는 것이 귀엽다고 웃고, 달 리는 도중에 다리가 걸려 넘어지는 것을 보고도 웃고, 절룩절룩 다리를 절면서 밖으로 나오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또 웃 습니다. 그리고 배부르게 먹고 마시면서 아주 만족해합니다. 달리기하는 아이들은 서로 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온통 땀과 흙투성이가 되고 때로는 피까지 흘리면서 자기의 온 힘을 다합니 다. 나는 자리에 누워있으면서 그러한 광경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날 해가 서산에 기울어졌을 무렵, "만세, 만세, 만세!" 하고 세 번 크게 울려왔습니다. 확성기에서 울려 나오는 노래는 하루 를 즐겁고 용감하게 보낸 마을 사람들을 기분 좋게 집으로 돌려보 내는 다정한 곡이었습니다. 이윽고 내가 누워있는 오두막 앞의 조그마한 돌길로 일렬로 나 란히 서서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텅 빈 도시 락을 귀찮은 듯이 덜컥거리면서도 흙투성이가 된 돗자리를 똘똘 말아 옆에 끼고, 머리는 흙먼지로 부옇게 덮였고, 새 옷 소매도 구겨졌으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발걸음도 무겁게 아주 지친 모습 이었습니다. 그 반대로 아이들은 셔츠는 땀투성이가 되어, 얼굴 과 손바닥과 무릎에는 빨간 약을 발랐으면서도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서로 외치기도 하며, 서로 앞서 가려고 뜀박질하며 아주 기 뻐하고 있습니다. 기뻐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들은 커다랗게 '상'이라는 도장이 찍힌 포장지로 싼 물건을 높이 뒤흔들며 자랑하고 있으니 말입니 다. 이 상은 운동회가 끝나고 폐회식을 할 때 교장 선생님께 각자 가 직접 받은 것일 겁니다. 사모님, 이런 운동회 광경은 곧바로 상상하실 수가 있으시겠지 요? 그리고 운동회가 끝나서 돌아가는 거리의 모습도 …. 사모님, 인간이 사는 세상도 하나의 운동 경기장입니다. 운동회 의 경기에는 100미터 달리기 경주도 있고 장애물 경주도 있습니 다. 인생의 경쟁은 주관자가 하느님이므로 불린 자는 그것이 단거 리든 장거리든 간에, 또는 어려운 것이든 어떠한 것이든 간에, 여 하튼 처음부터 끝날 때가지 전력을 다해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됩니 다. 부름을 받았음에도 그 부름에 응하지 않고 관람석에 그대로 앉 아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주변 사람들이 생활을 위해 고 심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고도 귀찮은 일이라고 본 체 만 체하고 는 혼자 별장 같은 데서 자기 취미에 맞는 생활을 즐기고 있는 사 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자기의 후세를 위해 기도한다면 과연 그 기도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사모님께서 그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계속 경쟁에 가담시키시고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천국에서의 커다란 상급을 준비하고 계시 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증 거가 아닐까요? 상급은 경쟁이 끝난 후, 곧 죽음 후에 곧바로 받는 것입니다. 그 리고 진정한 행복이란 하느님에게서 참 잘 달렸다 칭찬받고, "자, 이 승리의 꽃밭에서 편히 쉬어라."라고 위로의 말까지 듣는 것입 니다. 사모님, 도리우미야마 산바람은 살을 에는 것 같겠지요? 그러 나 영광의 문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기운을 내어 정해진 코스를 똑바로 달리십시오. 그 땀투성이가 된 모습을 보고 비웃 는 관람자들도 있겠지요. 그러나 응원해 주는 우리 편 사람도 많 습니다. 성모님을 단장으로 한, 천사의 무리가 응원단이 되어 사 모님을 응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